“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겉보기에 공정하고 정의로워 보인다. 이 명제는 종종 어떤 사람에게는 의욕을 북돋는 희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불공정하며, ‘노력’이라는 단어는 계급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구조적 현실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아비투스는 한 인간이 자라며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되는 문화적 습관, 가치관, 행동 방식 등을 뜻한다. 태어날 때부터의 환경이 그 사람의 욕망과 선택지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력’이란 말은 과연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일까?
상류층 아이가 영문법을 배우는 방식
중산층 가정에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과거 시제와 현재완료 시제의 차이를 열심히 설명한다. 숙제를 도와주고, 문법 강의 영상도 틀어준다. 가끔은 학원 교재를 같이 보며 진도를 점검한다. 여기까지도 사실 작은 사치다. 그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면 아이의 영어 공부를 도와줄 부모가 없다. 영문법이 뭔지도 모르고, 학교 수업 진도조차 따라가기 버겁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상류층의 방식이다. 거대 출판사의 사장은 자식이 어려서부터 두 개 국어에 능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든다. 아이는 외국 유모와 영어로 대화하고, 어릴 때부터 영어 동화책을 읽는다. 영문법? 그런 건 따로 배우지 않는다. ‘이미’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9살에 오페라 리사이틀에 참여하고, 필하모니 후원회 회원인 아버지 덕에 공연 뒤 오페라 가수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약간 쑥스러워하지만, 이 모든 환경은 곧 그의 아비투스로 굳어진다. 그 아이에게 ‘무대’란 두려운 공간이 아니다. 그에겐 무대 위의 태도, 몸짓, 발성, 발표 능력이 자연스레 각인된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구별 짓기(distinction)’와 ‘탁월함’을 학습한 아이가, 나중에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중산층의 야심, 하층의 현실 감각
중산층은 다른 방식으로 자녀를 키운다. 상류층처럼 ‘우아한 환경’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치열함이 있다. 외국어 교육, 음악 교육, 사회참여 활동도 시킨다. 아이에게 “너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해”라고 가르친다. 자제력, 충동억제, 효율성 같은 ‘성과 지향적’ 태도도 장려된다.
하지만 하류층으로 내려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생존이 최우선이다. 부모는 근면성, 현실성, 준법성을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현실을 직시하라”고 강조한다. 딸이 있으면 ‘대학’보다는 ‘공단 취업’을 더 현실적인 미래로 제시한다. 상류층 자녀들이 문화적 세련됨과 자기 표현을 배울 때, 이들은 ‘몸 쓰는 노동의 정확함’을 배운다.
부르디외는 이를 ‘아모르파티(Amor fati)’—운명 순응—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성공’의 기준을 같은 계급 안에서 찾는다. 다른 계급의 성공은, 너무 멀고 비현실적이기에, 처음부터 욕망의 목록에서 빠져 있다.
“공부는 인내심이다”라는 말의 위선
“공부는 집중력과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집중’이라는 것도 계급에 따라 조건이 다르다. 시끄러운 다가구 주택, 거실과 방의 구분도 희미한 가정, 밤낮 없이 돌아가는 TV, 학습지 한 장 펼쳐두기도 힘든 책상—그런 환경에서 ‘인내심’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가.
노는 걸 좋아하는 애들은 공부를 못 한다는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노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일 수 있다는 점은 이해받지 못한다. 하루 종일 편의점 알바를 뛰고, 늦은 밤 클럽이나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말고는 숨 쉴 틈이 없다면, ‘영어 단어 10개 외우기’는 너무 멀리 있는 과제다.
이 계층은 즐거움의 방식마저도 비난받는다. 클럽을 가면 ‘놀기만 좋아하는 애’가 되고, 노래방을 가면 ‘정신 못 차리는 애’가 된다. 하지만 상류층이 음악회를 가고, 리사이틀에 참여하며 누리는 문화는 고급 취미로 포장된다. 놀이는 계급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박사들 별 거 없다”는 말의 이면
하위권 대학에서 편입해 대기업 생산직에 입사한 사람이 박사들을 조롱하는 글을 인터넷에 썼다. “박사들 일머리 없다”는 식이다. 겉으로 보면 거친 계층 간 반항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의 밑바닥에는 사회 전체가 키운 ‘열패감의 뒤틀림’이 있다.
고급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몸으로 부딪치며 얻은 기술과 감각을 통해 사회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열등감이 혐오로 뒤바뀌기도 한다. 박사들의 이론적 언어, 문서 작업, 추상적 사고는 그에게 ‘현실감 없는 헛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진짜 비극은, 계급 간 상호 이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로부터는 ‘노력하면 돼’라는 냉소가 내려오고, 아래로부터는 ‘니들이 뭘 알아’라는 분노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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