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사회는 세계가 주목하는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은 세계 1위를 다투고, K-pop과 드라마는 전 세계 젊은 세대의 취향을 주도하며,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외교무대에서도 중견국으로서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며,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다. 하지만 이 찬란한 현재는, 때로는 지나치게 자부심에 도취된 나머지, 내부에 잠복한 위기의 징후들을 가리는 안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개를 뚫고 비추는 거울은 19세기 말, 조선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한국이다.
19세기 조선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는 역사적 변곡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위기의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멸망 후 자신들이 성리학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힌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히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문화적 우월감 속에 안주했다. 조선은 청조차 서구 열강에게 굴복하던 시점에도, 자신들만은 다르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현실을 외면한 위안이었고, 곧 몰락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와 다른가?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문명화되어 있고, 세계 중심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삼성이라는 글로벌 기업이 있고, 방탄소년단이 있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변방'이 아니며, 누군가의 식민지가 될 일은 없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반복되는 패턴은 분명히 존재한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단순한 외세 침략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부의 기득권 세력은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가져올 변화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위협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저항했다.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고, 동학농민운동은 외세의 손을 빌어 진압됐다.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는 국가의 장기적 전략이라기보다는 개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내부에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외부의 변화에 끌려다니다 사라졌다.
지금 한국은 어쩌면 이와 비슷한 구조적 위험 속에 있다. 정치권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을 적폐로 규정하고, 수사와 기소, 탄핵과 구속이 반복된다. 여야의 협치는 실종되었고, 국민 통합은 뒷전이다. 권력을 잡은 쪽은 개혁을 주장하지만, 그 개혁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설계된다. 이는 조선 말기 당쟁의 변형처럼 보인다. 정파적 이익이 국가의 이익을 앞서는 구조가 고착화되면, 외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민첩성은 급속도로 마비된다.
경제 역시 자만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않다. 반도체 산업은 분명 한국의 자랑이지만, 특정 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공급망의 국제 정세에 크게 좌우된다는 구조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노동 유연성, 청년 실업, 고령화, 부동산 불균형 등의 문제는 뿌리 깊은 구조적 과제지만, 이슈가 될 때만 단편적으로 접근될 뿐 장기적인 대응 전략은 드물다. 문화적 자부심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 인식보다 자기만족의 수단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K-pop의 성공이 곧 민주주의의 성숙이나 사회 정의의 실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또한, 조선이 청나라의 몰락을 보며도 자신들은 다를 것이라 착각했듯, 지금 한국 사회 역시 주변국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기보다, '우린 선진국이니까'라는 막연한 확신에 빠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의 선진국 지위는 절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경제와 안보, 문화, 제도의 복합적 균형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내부적 균열이 심화되고, 그 균열을 감추기 위해 성공에만 집착한다면, 역사는 언제든 반전을 준비한다.
결국 메이지 유신과 조선 말기의 차이는, 위기의 순간에 누가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도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냈는가에 달려 있었다. 일본은 무사 계급 내부에서 혁신이 나왔고,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국가를 바꿨다. 조선은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체제는 그들을 밀어냈고, 변화는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국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능성이 많은 나라다. 교육 수준도, 시민의식도, 문화적 역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진짜 문명은 자화자찬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증명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조선 말기의 거울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우리가 그들처럼 현실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는 일이다. 가장 무서운 몰락은 몰락이 오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중심에 있다고 믿는 착각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착각은, 늘 찬란했던 문명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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