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화권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 변화 속에서 불변의 원리를 파악하는 노력 또한 해왔다.
그런 행위의 결과물이 바로 중국의 노장사상과 주역, 불교의 윤회설등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인간의 불변에 대한 바램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에 때론 절망하고, 때론 그것을 통해 현상의 드러난 외양에만 붙잡히지 않는 현명함까지 갖추게 되었다.
때문에 옛 사람들은 어떠한 인간이나 자연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그렸다. 때문에 보이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드러나는 색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수묵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를 살펴보면 수묵화는 난만한 채색화의 시대가 끝나가는 원숙기에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물은 무채색이다. 무채색이란 색이없다 또는 색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다. 과학적으로도 검정은 모든 색이 합쳐진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며, 광선에서는 모든 빛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검정은 색이 아닌 것이다. 무채색은 온갖색이 사라져서 화려함이 없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옛부터 먹에는 온갖 색이 들어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검정이 모든 유채색으로 부터 시작되는 근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검정에는 소량의 청색 또는 갈색등이 섞여있다. 이를 통해 수묵화는 아주 미세하지만 은은하며 무한한 색조의 변화를 드러낸다.
무채색은 지극히 순수하고 검소해서 내면의 정신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때문에 종교에서 복장은 대부분 무채색이다.
한편 검정색은 역설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색이기도 하다. 그 예로는 최고급 승용차의 색상이 검정인 것이 있다.
서양의 유채색 화가 앙리 마티스는 죽기 직전에 검정 선만을 이용해 종교화를 그렸다. 세속적인 감각과는 거리를 두는 종교화에서는 색에 포함할 수 없는 검정을 사용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검정으로 글씨를 인쇄하는 이유는 일체의 외적 사물과 그들이 풍겨내는 잡다한 인상으로부터 독자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종교화에 채색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색깔들을 전체 도상의 일부로 정교하게 부분부분에 한정하여 사용함으로써 종교의 지고한 이상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제시하는데에 봉사할 뿐이다. 이는 수행인을 위한것이기 보다, 신도들의 마음에 내세헤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기 위한 장식이었다.
수묵화는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회색이 생리학적으로 시각속에서 완전한 평형 상태가 되고 이를 통해 명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묵화는 이를 통해 보는이에게 편안하게 하고 안정감을 준다. 통계적으로도 동양의 수묵화가들은 장수했고, 서양의 채색화가들은 단명했다.
또한 수묵화는 점잖아서 보는 이를 자극하지 않는다. 보는이가 조용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그림속에 스스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는 이가 사전에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한다. 흔히 문인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천 리의 먼 길을 다녀보고 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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