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전’이라는 이름의 리셋
2025년 5월 12일, 미국과 중국은 제네바에서 고위급 회담을 열고 극적으로 90일간의 관세 완화 조치에 합의했다. 이번 합의는 단지 무역 갈등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정지 신호'일 뿐, 양국 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번 합의는 단기적으로 시장에 안도감을 줬다. 다우존스와 상하이종합지수 모두 상승 반응을 보였고, 희토류 관련 수출주와 소비재 섹터가 급등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합의는 ‘잠정적 휴전’일 뿐이며, 기존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잔존해 있다.
■ 주요 합의 사항: 관세 완화와 비관세 조치 해제
이번 합의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다.
- 관세 인하: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대해 평균 145%에서 30%로, 중국은 미국산 제품에 대해 평균 125%에서 10%로 관세를 낮춘다. 이는 90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되며, 해당 품목에는 소비재, 농산물, 전자기기 부품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 등 민감 품목은 예외다.
- 비관세 보복 조치 해제: 중국은 희토류 및 배터리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다. 이는 미국의 반도체, 군사 장비, 청정에너지 산업에 중요한 조치다.
- 협상 메커니즘 구축: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 무역대표 제이미슨 그리어와 중국의 허리펑 부총리가 공동 협상 테이블을 정례화하기로 했다.
- 펜타닐 문제 협력: 펜타닐 원료의 불법 유통과 관련해 양국은 협력 채널을 열기로 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 이후 미국 내 심각한 마약 문제 대응의 일환으로도 해석된다.
■ 왜 지금, 그리고 왜 90일인가?
이 시점에서의 합의는 정치적, 경제적 필요가 맞물린 결과다.
미국은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인플레이션 압력 완화가 절실하다. 특히 중서부 공장지대와 농업주에서 중국과의 갈등은 바이든 혹은 트럼프 양측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공화당이 다시금 트럼프 전 대통령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트럼프식 '딜'의 방식으로 관세를 재조정하는 압박이 컸다.
중국 역시 부동산 경기 침체와 청년 실업률 문제로 인해 수출 의존도를 다시 높이려는 전략을 택했다. 외환 보유액 감소, 위안화 약세 우려 속에서 미국 시장의 수입 확대는 절실했다.
하지만 '90일'이라는 기한은 상징적이다. 양국 모두 진정한 관계 회복보다 시간 벌기에 가까운 합의를 택했다. 내부 정치 일정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돌파구가 아니라 '연기 전략'이 선택된 셈이다.
■ 미국의 전략: 시장과 표를 동시에 겨눈 셈법
미국의 전략은 명확하다. 관세 인하를 통해 수입물가를 낮춰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되, 기술 통제와 안보 연계 조치는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도체 장비, AI 칩, 양자기술 등 고부가 기술은 여전히 수출 통제 목록에 올라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중산층 소비자와 농가, 중소기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동시에, '중국 견제'라는 대외정책의 기조는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합의문 어디에도 “패권”, “전략적 신뢰”와 같은 근본적 관계 개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일본, 한국, EU와의 '우방 블록'을 강화해 중국을 기술·자본 측면에서 압박하는 다층적 외교를 펼치고 있다. 미국에게 있어 중국은 '협상할 수는 있으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 중국의 반응: 내수보다 수출, 자강보다 유화
중국 역시 이번 관세 완화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이번 합의가 ‘굴욕 외교’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해, 관련 보도를 제한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관영언론은 미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내며, 국내 여론을 통제하고 있다. 이는 시진핑 정부가 경제 악화와 중산층 불만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겪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또한, 미국과의 협상 외에도 브릭스 확대,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 중앙아시아 신실크로드 프로젝트 등으로 외교 다변화를 모색 중이다. 하지만 그 어떤 대안도 미국 소비시장만큼 크고 즉각적인 수익을 안겨주지 않는다.
■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 기술과 감정의 전쟁
관세는 피상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이번 무역 합의의 이면에는 ‘기술 패권 전쟁’이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통신 장비, 바이오, 국방 산업… 이 모든 분야에서 양국은 협력이 아닌 ‘디커플링’을 지향하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서로를 닮은 듯한 봉쇄 전략’이 진행 중이다. 미국은 기술과 금융을 무기로, 중국은 공급망과 희토류를 무기로 대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감정'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양국 국민 사이의 반감은 제도보다 더 깊어졌다. 이는 향후 어떤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감정적 지지 기반이 취약함을 뜻한다.
■ 결론: 다음 90일,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이번 합의는 분명히 숨통을 틔우는 일시적 조치다. 하지만 그것이 안정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90일간의 유예'는 더 큰 전선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 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후 협상에서 기술, 안보, 인권, 자본 이동까지 아우르는 진정한 구조개편이 가능한가이다. 시장은 일시적 안정을 택할 수 있어도, 국가 전략은 단기 호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다음 90일, 우리는 또다시 ‘협상의 기술’이 아닌 ‘전략의 철학’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진정으로 마주하고 있는 전장은 상품과 관세가 아니라, 시스템과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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