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정부는 자금경색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 적절한 처방전을 내리는 의사 역할을 자처해왔다.
돈이 필요한 곳에 돈을 공급하고 거래가 안되는 곳에 가서 거래를 재개시켜 왔다.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곳이 얼마나 어떻게 막혔을까. 이미 정책 카드를 쓸 만큼 썼는데 아직도 문제가 남은 것일까. 앞으로는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1. 금융시장 기능
- 복잡한 금융시장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계 기업 정부 등 자금의 수요자와 공급자를 엮어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기능은 다양하지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유동성 공급자의 기능이 크게 약화된 데다 금융거래에 드는 시간ㆍ비용 절감기능도 제대로 못해주고 있는 것.
금융시장은 기본적으로 금융자산을 보유한 투자자들에게 유동성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쉽게 말해 금융자산을 돈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금융시장이 발달할수록 금융자산을 돈으로 쉽게 바꿀 수 있고(환금성이 높아지고), 유동성을 구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프리미엄)도 떨어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신용경색 문제는 이를 어렵게 만들었다. 자산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 비싸진 것. 즉, 유동성 프리미엄이 급격히 높아져 자금 수요자들의 차입비용 또한 높아졌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금융거래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도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여유 자금을 굴리기 위해 '돈 쓸 분'을 직접 찾아다닌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는 차입자의 신용에 관한 정보가 차입자가 발행한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 등에 모두 반영돼 있기 때문에 시간낭비, 돈낭비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심각한 신용경색이 지속되고 있는 요즘 같은 때는 이런 원칙이 안 맞는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 신용경색이 지속될수록 시장의 가격정보가 부정확해져 거래가 줄거나 왜곡된 가격이 나오게 마련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자금경색' 상황이다.
2. 자금경색의 원인, 은행
이번 금융위기는 해외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최근 국내 자금경색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는 은행이다.
지난 2005년 말 이후 올해 상반기까지 2년 반 동안 은행의 기업대출은 185조원이 늘어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최근 몇 년간 주식ㆍ부동산시장에 붐이 일어났다.
시중자금은 은행을 빠져나와 주식시장이나 주택금융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실제 지난해에는 이런 이동이 본격화되면서 대출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 은행들은 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실제로 지난해 정기예금은 11조9000억원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주식형 펀드로 한 해 동안 추가로 유입된 돈은 69조9000억원에 달한다. 결국 은행 등은 은행채 및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을 확대하면서 대출 재원 확보에 나섰다.
2007년에 은행채와 CD 증가액은 48조5000억원에 달했다. 사실 은행들이 막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자산 확대 경쟁을 벌인 것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은행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은행도 직격탄을 맞았다.
외국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은행에 대한 재무 건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신용도를 낮추었고 은행들은 은행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지난 9월 중순에 6.7% 수준이었던 은행채 금리는 11월 들어서 7.8%로 1%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대출, 가계 대출 부실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서 은행은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다.
3. 중소기업 대출 제한
은행들은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대내외적인 경제여건이 불확실해지면서 대출 심사기준을 강화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부실대출 위험을 억제하기 위한 은행의 노력은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그 타격을 중소기업이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올 상반기만 해도 중소기업의 은행 대출은 월평균 5조7000억원 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금융시장 불안이 본격화된 10월에는 대출이 2조6000억원 증가에 머물렀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문제는 부실한 중소기업뿐 아니라 튼실한 중견기업마저도 자금에 압박을 겪고 있다는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은행 지원을 통한 유동성 경색 해소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꽁꽁 얼어붙은 자금시장의 여파로 회사채 발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회사채 발행은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게다가 지난 9월 이후에는 신용위기로 인해 신용이 낮은 회사채 발행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올해 9월까지 우량 회사채 발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서 21.5% 증가했지만 비우량 회사채는 1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위기가 단기간에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아 시장에서 위험 자산 선호도는 낮아질 전망이다. 그만큼 중소기업들의 자금 조달은 앞으로도 어려워질 전망인 것이다.
10월 이후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총 1.25%포인트 인하했지만 일부 회사채 시장금리는 오히려 상승하고 있다.
3년 만기 회사채(AA-등급)는 10월 27일에 7.87%이었지만 지난 6일에는 8.12%로 상승했다.
이로 인해 지난 10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중소기업의 10월 자금사정 기업실사지수(BSI)는 68(기준치=100)로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이번주에 채권시장 활성화를 위해서 10조원 규모 채권시장 안정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치가 꽉 막혀 있는 회사채 시장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4. 과거 신용경색 사례
과거에도 우리나라 경제에 신용경색 상황은 몇 차례 나타났다.
1998년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한국은행은 고금리 정책을 통해 외화가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국내 금리를 높게 유지함으로써 외국에서 자금이 유입되도록 촉진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는 과정에서 은행 대출이 줄어드는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은행은 다시 금리를 떨어뜨리고 총액한도대출 제도 변경 등을 통해 은행이 대출을 늘릴 수 있는 유인을 제공했다. 신용보증제도를 개선하고 금융회사에 자본을 보강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런 노력으로 99년 2월 이후 은행 대출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으나 그해 7월 대우그룹 구조조정 문제와 투신사 수익증권 대량 환매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은행은 다시 채권시장안정기금을 통해 국채 우량회사채 등을 매입했으며, 공사채형 수익증권 대량 환매를 막기 위한 부분환매제도도 실시했다.
2000년 후반에는 또 직접금융시장에서 경색이 발생하기도 했다.
97년 발행한 회사채 만기가 2000년 하반기에 집중되면서 신용도가 낮은 기업은 차환발행이 어려워진 것. 정책당국은 당시 기업자금사정 원활화 대책을 내놓고 회사채 수요를 늘리기 위한 채권형 펀드 조성 등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2003년에는 신용카드사가 금융시장 신용경색을 초래하기도 했다. 2003년 경기부진으로 가계 채무상환 능력이 떨어지자 카드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된 것. 당시에도 한국은행과 정부가 나서서 카드채를 매입하는 등 자본보강 작업에 들어갔다.
5. 원화, 외화 유동성 모두 문제
실물분야로 퍼져가는 유동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은행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6월 현재 금융권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규모는 약 78조원. 가계대출도 50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가계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금융회사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다.
전 수석연구원은 "정부는 외화 유동성 대책은 쏟아내고 있지만 원화 유동성에 대한 대책은 아직 부족하다"며 "특히 제2금융권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외화유동성 문제도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한ㆍ미 통화스왑으로 일단락된 듯하던 외화유동성 문제는 최근 원화값 급락, 크레딧디폴트스왑(CDS) 프리미엄 상승 등으로 다시 터져나오고 있다. 시장을 안심시키기는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외화유동성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외 금융위기 탓이다. 따라서 국내은행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고 통화스왑을 한다고 해도 외화조달의 어려움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은행은 금고를 열어서 외환보유액을 통한 지원을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외환보유액 급감 등을 우려한 외국계 신용평가사들이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기 때문.
이번 금융위기는 우리나라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초대형 재앙이다. 따라서 결국 자금시장에 막힌 부분을 뚫어나가면서 전 세계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자금경색이 나타날 때마다 정책당국의 대응도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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